가족이야기

그리운 나의 어머니

hong-0925 2020. 10. 10. 16:08

 

 

자기 어머니가 소중하고 훌륭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 나의 일생의 좌표가 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지금도 내 머리솎에 꽉 차 있다. 나의 어머니의 힘들고 고단했던 삶을 잘알기때문에 나의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 그리고 그리움이 더 큰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요약 정리해 보았다.

 

가. 딸딸딸에 마음 고생이 많았던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딸을 많이 낳아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딸만 쭈루룩 낳을 때 죄인같았다고 했다. 할머니한테 구박도 많이 받았답니다. 1930-40년대에는 농촌에 의료시설이 없어 애를 낳으면 얼마안가 죽는 것이 다반사였단다. 어머니께서는 결혼 20년동안 딸5명에 아들 2명을 낳아서 아들 1과 딸 3만 살고 딸3명과 아들1명을 잃었다.

자식을 낳아 얼마 키우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바로 나의 윗 형는 태어 나고 얼마 못살고 죽었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한동안 동네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정신을 잃고 살았다고 한다. 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그 당시 딸 4명을 쭈루룩 낳고 겨우 얻은 아들을 잃었으니 나의 어머니 마음이 어떠했을까 상상이 간다. 어머니의 가슴이 뭉글어 졌다고 한다.

 

나. 어린 아들 때문에 애간장을 태운 어머니

 

나도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운 아들이다. 첫아들이 죽고 3년 후에 나를 낳았다. 나도 몸이 약해 두 살 때 고열이 나고 곧 죽을 것 같았답니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아픈 사람이 있으면, 점을 보거나 굿을 하였단다. 굿을 해도 낫지 않으니 어머니는 또 아들을 잃을까봐 미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전에서 고등학교선생을 하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셔서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페니시린 주사1대 맞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로 나는 평탄하게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하여 사촌형제들과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사촌동생이 피부병을 옮아와 나에게도 옮겼다. 동네 약국에서 피부병약을 먹었는데, 너무 독한 약해서 그런지 위천공으로 큰 수술을 하여 어머니의 애간장을 또한번 더 태웠다.

 

다. 부지런한 농부로 산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께서는 애들하고 살아갈 걱정에 눈물도 안 났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 나이 47살, 큰 누나는 23살, 작은누나 20살,나 11살,여동생7살이었다. 어머니는 졸지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은 물론 가정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한 겨울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논이나 밭에 가서 일하고 어두울 때 집으로 오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밥하고 빨래하는 가정일은 누나들이 전담했다.

그 당시 논 3,000평,밭 1100평정도의 농사를 지었다. 남자가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가 없어 일꾼머슴을 1명 두었다. 머슴은 쟁기질,풀베기,퇴비만들기등 힘든 일을 하고, 어머니는 씨뿌리기,김매기,보리베기,벼베기,물푸기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농사를 지어 보면 알지만, 이런 일들이 작업량이 많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아침새벽에 들로 나가면 어둑어둑해야 집으로 오셨다. 앞으로 남편없이 살아나갈 두려움과 잡념을 떨치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고 훗날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농사일뿐 만아니라 수확한 농산물을 대부분의 농부들은 수집상에게 집에서 팔았지만, 어머니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위해 9km나 떨어진 대전으로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가서 팔았다. 나도 쌀 2말 즉 16kg을 지고 어머니를 따라간 적이 여러번 있다. 어깨가 빠지는 것같이 아팠다. 힘들어도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할 욕심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위해 떡을 만들어 시장에 가서 팔기도 하였다. 이처럼 돈이 되는 일은 거의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같은 동네에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이 있었다. 다같이 남편이 없으며, 재산이 우리집보다 그 집이 훨씬많았을 뿐아니라, 그집은 아들1명에 딸 2명으로 우리집보다 1명이 적었다. 우리집보다 유리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안가서 우리집은 땅을 사고 그집은 땅을 자꾸 팔아 우리집 재산이 그집보다 많아졌다. 그 집은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남을 시켜서 농사 짓고 또 소비가 강하여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했다.

이런 것을 보시고 삼촌들은 어린 자식들을 잘 키우고 재산도 늘리는 어머니께 장하시고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라. 근검.절약이 몸에 밴 어머니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와 있을 때 일하고 오셔서 더러워진 옷을 벗어 놓은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옷은 여름이라 시원한 삼베로 만든 것이었다. 속옷을 한번 기운 것도 아니고 몇 번을 덧대어 기운 옷이었다. TV로 본 성철스님이 덧대어 기운 누더기 적삼보다 더 누더기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옷은 몇 번씩 기어 입고, 거의 매일 보리밥, 시레기 죽, 고구마, 감자로 끼니를 때우고, 돈을 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논과 밭을 여러 필지를 사셨다. 돈을 아낀 예를 들면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졸업여행을 갔을 때 였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동학사를 거쳐 계룡산을 등산하고 갑사를 돌아 오는 1박 2일 코스였다. 어머니께서 졸업여행비로 17원을 주셨다. 나는 17원을 받고 좋아라 하며 학교에 갔다. 그 당시에 소풍가는 날에는 오징어와 사이다를 가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교에서 이동판매상으로부터 나는 오징어 1마리와 사이다 1병 그리고 사탕 몇 개를 사고 돈을 다 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사에 도착하니 반장이 선생님께 선물한다고 5원씩 돈을 걷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돈이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다행이 소풍비로 50원을 받아온 친구가 있어 빌려서 냈지만 얼마나 창피하던지 돈을 적게 준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50원을 받아온 친구네보다는 우리 집이 훨씬 부자였다. 친구네는 1년 후에 빚이 많아 야밤도주하고 친구는 큰아버지 집에서 학교를 다닐 정도로 어려웠는데도 소풍비 50원을 받고, 나는 자꾸 논을 사는 부자집인데도 17원 밖에 못 받았으니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커서 어머니께 여쭤보니 돈을 아끼지 않으면 너를 대학에 못 보낼 까봐 절약 또 절약하셨단다. 그 말을 듣고 철부지였던 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어머니는 먹는 것에서도 절약이 몸에 배셨다. 그 당시에는 겨울에 아침은 밥, 점심에는 고구마 또는 굶고, 저녁에는 씨래기죽, 콩나물죽, 무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여름에는 일을 해야 하기때문에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데, 깡보리밥에 콩밭열무로 비벼 먹는 경우가 많았다. 밭에서 직접 재배한 밀을 동네 방앗간에서 빻아 자주 칼국수를 해 먹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홍두개로 밀고, 국수를 썰 때 꼬랑지를 구어 먹으면 고소하고 맛있다. 그래서 그 꼬랑지를 구어 먹게 달라면 들은 척도 않하고, 끝까지 다 설어 국수를 만든다. 어린마음에 야속할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름에는 자전거를 타고 농촌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아이스께키를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 돈으로 사 먹지만 빈병,쇠붙이,헌양은냄비등 고물을 주고도 사먹을 수 있었다. 나도 어린마음에 얼마나 사먹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초등학생때 까지는 소풍날이외에는 아이스께키를 사먹어 보지를 못했다.

또 겨울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티밥 튀기는 사람이 있었다.가난한 사람도 쌀,강냉이,콩,보리등를 가져다 펑튀기를 만들어 애들 간식으로 주었다. 그러나 우리집은 아무리 졸라도 펑튀기를튀기는 적이 없었다. 어머니말씀은 아이스께키나 튀밥은 배를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과 가족에게는 엄격하셨지만 남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머슴에게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시며 꼭 밥을 해서 먹였다. 논농사 약 5,000평, 밭농사 1,000평을 소유하고, 선재를 사서 농사를 크게 짓다보니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일꾼 머슴 1명을 두고 농사를 지셨다. 가족은 죽을 먹어도 머슴에게는 밥을 따로 해 먹였다. 쌀이 귀한 여름에도 꽁보리밥이 아니라 쌀을 30%정도 섞은 보리밥이었다. 뱃심으로 일하는 것인데 일하는 사람을 배 골리면 일을 못한다고 3끼 챙겨 주셨다. 나는 머슴과 겸상을 하는 덕분에 다른 가족이 죽을 먹을 때도 밥을 먹었다.

 

마.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무척 싫어 했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좋은 직장을 다니며 여유롭게 사는 삼촌들에게도 경제적으로 신세를 절대 지지 않으셨다. 오히려 농사 진 곡식을 삼촌댁에 보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우리집과 사이가 좋은 이웃집에 우마차가 있었다. 우리머슴은 일을 쉽게 할여고 자주 우마차를 공짜로 빌려 쓰려고 했다. 어머니는 빌려 쓰지 말라고 해도 머슴은 일을 편하게 하고 싶어 말을 듣지 않고 빌려 썼다. 어머니께서는 신세지기 싫다며 우마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축은 하였지만, 빚지는 것은 비상으로 알고 논을 살 때도 빚은 전혀 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나도 집을 처음 살 때 약간의 은행대출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빚을 모르고 살아왔다.

 

바. 배움의 소중함을 아셨던 어머니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한글을 작은 외삼촌으로부터 배웠다고 하셨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외삼촌이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한글을 저녘에만 3일동안 가르쳐 주셨단다. 그 후로는 독학으로 한글을 해득했다고 한다.

또한 나의 삼촌들도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한 분은 고교교사로 근무했고,다른 한분은 금융조합에 근무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배움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겨울 농한기에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으로 많이 모여 들었다. 우리 집이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 된 것은 우선 아버지가 안계시니 마음이 편하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읽어 주는 흥부전,춘향전,장화홍련전,심청전등 고전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어머니 또래의 아낙들은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단하였다.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은 것도 다 나와 여동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 집도 그렇고 외가 집도 배운 사람은 공무원 또는 회사원으로 잘사는데, 못 배운 사람은 농사일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어린 자식은 대학까지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단다.

어머니는 내 여동생을 공부시겨 하이힐 신고 도청에 들락거리도록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생각이 난다. 공부시켜 공무원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 당시 나는 시골사람 치고는 공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도록 어머님의 뒷받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는 여동생에게 대학에 진학하라고 했다. 그러나 여동생은 우리 집안 형편에 오빠하고 같이 대학에 가는 것은 무리라고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어머니는 군것질은 못하게 하여도 등록금은 항시 제 날짜에 내고 책이나 학용품을 산다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해 대전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는데 집과 학교까지 약 9km를 걸어서 다녔다. 어린나이에 새벽 5시30분경에 일어나 식사하고 6시 출발하여 8시경에 등교하니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피곤하여 수업시간에 졸기 일 수였고, 집에 오면 밥먹고 쓸어저 자는 것이 일이었다. 성적이 나쁠 수 밖에 없었다.

당황한 어머니께서 대전에 사시는 작은아버지께 말씀드려 작은 아버지댁에서 학교를 6개월 정도 다녔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를 많이 보살펴 주셨다. 그러나 내가 먹는 쌀은 어머니가 대주었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초반에는 반에서 중간정도의 성적으로 조금 올랐으나 그이상은 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잘해 준다고 해도 내 집만 못하고 성적도 오르지 않고 해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학교를 다녔다. 대신에 4km거리인 유성까지는 자전거를 타고가고 유성서 대전까지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면서 다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덕에 대전명문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입학했다.

그 당시 농촌에서 대학을 보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면 단위에서 초등학교 400명의 동기동창 중에서 4년제 대학에 다닌 동기는 10명이 되지 않는다. 특히 서울로 유학을 사람은 3명 정도였을 뿐이다. 어머니 홀로 나를 이렇게 대학까지 보내 준 것에 대해 평생을 두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사. 선진 문명을 빨리 받아 들인 어머니

 

또한 어머니께서는 문물을 알아야 한다며 책도 사서 보시고, 정보를 얻기 위해 라디오나 TV도 남보다 일직 장만하였다. 라디오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설치했다. 그 당시에는 뒷산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집까지 전기줄로 연결하여 소리를 듣는 스피커 같이 생긴 라디오였다. 춘향전,장화홍련전등 인기연속극을 듣기위해 동네 아주머니와 애들이 밤마다 모였다. 라디오 뿐 만아니라 흑백TV도 동네에서 가장 먼저 구입하여 연속극과 권투중계를 할 때는 동네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거의 다 모여 시청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퇴비증강운동을 펼칠 때 우리 마을이 경시대회에서 대통령상과 부상으로 재봉틀을 받았는데, 동네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봉틀을 팔 때 우리가 사기도 했다.

 

아. 겉으로는 나에게 냉정했던 어머니

 

남들은 내가 늦둥이 외아들이라 귀염을 받으면서 잘 먹고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티밥,아이스께끼등 주전부리를 전혀 사주거나 해주신 적이 없다. 용돈도 약간 모자랄 정도로 주어 저에게 전혀 빈틈을 주지 않았다. 작은 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오래간 만에 집에 가도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이 “왔니” 하면 끝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방학이 되어야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한 5개월 정도는 떨어져 살다가 방학때에나 집으로 갔다. 대학생활 4년 동안 불안한 정국의 연속이었다. 매 학기마다 데모를 하여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위수령이 발포되었을 때는 학교가 휴교령으로 문을 닫았다.

휴교령이 내렸을때 집으로 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일하실 것으로 예상되는 밭으로 달려가서 “저 왔어요”라고 인사을 드렸다. 어머니의 반응은 무덤덤하게 “왔니” 그 말만하고 김매기를 계속하는 어머니였다. 다른 어머니 같으면 아들을 켜 아느며 왔다고 반가워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마음속으로는 무척 반가워 하셨을거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또 내가 결혼한 이후에는 집안 살림을 며느리에게 일임하고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며느리에게 잘했다 못했다는 말씀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집사람은 애기하였다. 주위분들에게 젊은 사람이 어련히 알라서 잘할텐데 무엇 때문에 간섭하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손자 보는 재미로 노후를 보내셨다.

 

 

자. 나에게 전부 주고 가신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성품을 물려받은 것 같다. 근검 절약정신,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성격,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35년의 직장생활에서 내외부에 인사청탁을 하거나 이권에 관련되어 잇속을 챙긴 적이 없었다. 나의 신상에 대해 상사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고, 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책을 보고, 열심히 업무추진을 하는 등 자기개발을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머니가 부지런히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모은 전 재산을 나에게 물려주어 나의 가족이 크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부부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어머니 방에서 함께 TV도 시청하고,집안일과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 10시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우리방으로 와서 잠을 잤다.

어머니의 동네친구인 할머니들게 점심으로 칼국수를 자주 대접하였다. 그뿐이 아니라 어머니께서는 말년에 병환으로 고생하실 때 나의 부부가 5년여 동안 병간호를 하며 모시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어머니 병을 고치려고 수지침,한의원,종합병원,민간요법등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찾아 다녔다.

늙고 병들면 마음도 약해지는가 보다. 어느 날 퇴근하여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하니 오늘부터 천주교를 믿기로 했으니 너의 부부도 같이 믿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이종사촌 누님의 권유를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믿으라면 “믿지요”라고 대답하고 집사람에게 의사를 물으니 자기도 어머니의 뜻에 따르겠다고 한다.

그 후로 우리 식구는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장례도 천주교 장례절차로 모셨다. 이 또한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유산이다. 어찌 보면 재물보다 더 중요한 영적.정신적 유산이다. 마음의 안정을 주시고 가정의 평화를 주시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해주셨다고 생각된다.

우리 부부가 어머니를 5년여 동안 모시는 것을 지켜본 아파트단지 주민자치위원회에서는 나의 아내에게 효부상을 주었다. 이것도 어머니가 주고 가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 누님들과 여동생 모두가 어머니 병간호에 고생한 우리 부부가 어머니의 유산을 받아야 한다고 도장을 찍어 주었다. 시누이와 올케간의 사이가 친형제처럼 지금까지 화목하게 지내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어머니는 나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고 가셨다. 그러니 나는 평생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 나의 어머니 >
< 풀을깍는 어머니 >
< 60대이셨던 어머니 ....공주 신원사에서 >
< 어머니 회갑기념사진 >

 

'가족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주들아! 학교입학을 축하한다  (0) 2021.03.03
추억이 희미한 나의 아버지  (0) 2020.10.10
내리 사랑  (0) 2020.10.07
한가위를 보내며  (0) 2020.10.01
봄은 왔는데.......  (0) 202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