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의 보물1호 : 연립주택자치회의 표창장
나는 결혼후 1년동안 반지하의 전세방에서 부부만의 신혼생활을 하였다. 어머니는 대전 유성에서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우리부부는 평생 농사짓느냐고 고생만하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1년에 걸쳐 설득하였다. 매월 용돈을 2만원을 드리고
편히 모시겠다는 약조를 했다. 1976년에 시골집을 200만원에 팔고 서울 은평구에 단독집을 전세로 얻어 어머니와 합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월급이 5만원이 않되던 시절이라 어머님께 2만원을 드리고 생활하면 항상 가계비가 부족하였다. 이 약속을
어머님이 돌아기실때까지 지켰다.
우리부부는 1977~1978년 집값이 폭등하여 고민끝에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25평형 연립주택을 대출금을 끼고 구입하였
다. 당시에는 대출금이자가 년 25%의 고율이라 부담이 컸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했기때문에 무리를 하여 구입했다.
방이 큰 안방을 어머니께 드리고 우리부부는 작은방을 사용하였다.
우리부부는 평소에는 어머니방에서 생활하였으며 TV 시청도 어머니와 함께하고 밤 10시에 우리방으로 가서 잠을잤다.
76년에 큰손자,79년에 둘째 손자,1981년에 셋째손자를 어머님께 안겨 드렸다. 딸을 많이 낳으신 어머님은 손자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어머니가 40대 후반,나의 나이 11살때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홀로 농사를 지어 누님 2명을 시집보냈다. 그리고 나는
서울의 사립대인 고려대를 보내고 여동생을 대전여고를 보냈다.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짓느라고 일평생 고생만 하셨기에
우리부부는 잘 모신다고 집안일을 전혀 하시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시간만 나시면 손자를 등에 업고 또 손자의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서 손자들 과자 사주는 재미로 사셨다. 또
한 동네 노인들과 어울려 손자들 재롱을 보는 재미로 사셨다.
동네 노인들이 집에 놀러 오시면 소피아는 정성을 다해서 노인들을 모시고 때가되면 깔국수등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동네 노인들이 우리집에 자주 오셔서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었다.
그런데 호사다마인가? 일평생 고생만하시다가 말년에 아들내외의 보호를 받으며 편히 사실만하니 어머니에게 평마가 찾아왔
다. 발가락이 조금씩 떨리더니 점점 심해저 친구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오랬동안 침을 맞아도 차도가 전혀 없었다.
종합병원에서 종합검진을 한 결과 파킨슨씨병이라고 했다. 고칠 수는 없고 병세를 지연시킬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동네노인들로부터 용하다는 것을 듣고 오시곤 했다. 우리부부는 어머님이 치료를 받고 싶어하시는 곳은
모두 찾아가서 진료를 해 보았다.
매일 새벽에 염창동에서 택시를 타고 우이동에 있는 수지침술원을 다녀와서 회사에 출근하기를 2달동안 하였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1979년 하루에 택시비만 왕복 1만원이 들었으니 나의 월급으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집구입대출금이자와 어
머니 치료비가 많이 들어 항상 돈에 쪼들리면서 살아야 했다. 그때가 우리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다.
우리부부는 못고치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께서 치료받기를 원하시는 것을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모두 다 해드렸다. 그리고
동네 노인들이 집에 놀러 오시면 소피아가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하였다. 나는 소피아에게 어머니가 고생을 하신 이야기를 해 주며
어머니를 잘 모시자고 다짐을 하곤 했다.
어머니의 병환이 악화되어 간병인을 두어보았지만, 간병인들은 어머님이 잠을 못자게 하여 힘들어 억만금을 주어도 못하겠다고
5일도 못버티고 돌아갔다. 나는 회사에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들어오고 소피아 혼자 애들 3명과 어머니 간호를 하느라고 눈코뜰
새가 없이 고생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소피아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머님은 6년동안 병마와 싸우시다가 1984년 여름 73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며 우리부부에게 3가지
를 주시고 가셨다.
첫째는 병마와 싸우실때 우리부부에게 천주교를 갖도록 인도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정에 화목과 평화를 가져다 주신것
같다.
둘째 연립주택자치회에서 평소 어머니를 모시는 소피아를 보고 표창장을 주었다. 사실 소피아와 나는 우리부부가 당연이 할일을
했을뿐이라고 극구사양했지만 막무가네로 표장장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님께서 일평생 일구신 농토를 물려주셨다. 누님 2분과 여동생이 어머니 모시느냐고 고생했다고 어머니의
유산을 포기하고 모두 우리부부에게 주셨다. 그렇지만 우리부부는 어머님의 유산중 일부를 생질들 대학등록금하라고 주었다. 이처
럼 우리자매들은 어느가정의 자매 못지 않게 서로 아껴주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우리부부는 물론 아들가족이 무탈하고 평화롭게 살 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은 우리부부가 어머님께 정성을 다해 모신 덕분에 받는
행운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보곤 한다.
즉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의 보살핌으로 받은 소피아의 표창장이 우리집 1호가보가 되고도 남지 않을까?